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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옻칠과 원주 칠의 역사

옻칠과 원주 칠의 역사

옻칠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옻칠의 역사

  • 컵형칠기(컵形漆器)

  • 칠공예는 중국, 한국, 일본(류큐 · 오키나와) 등의 동아시아, 대륙부인 동남아시아,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에서 자라고 재배되는 옻나무 수액을 이용한 공예로서 약 9천년의 역사를 가진 아시아의 독특한 공예이다.
    동양의 칠공예는 생산도구의 접합과 고정을 위한 접착제로 쓰였던 것이 그 시초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후 천연자원을 이용하여 칠기를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칠공예는 중국 칠공예의 문화와 기술의 영향을 받아 전개 되었지만 단순히 문화를 수용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특출한 표현 방식과 여러 가지 제작기법을 고안하면서 발전하였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칠공예 관련 유물은 충남 아산 남성리 석관묘에서 출토된 칠 조각이다. 이후 칠기는 삼국시대 이르면서 크게 성행하였으며 대부분이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우리 원주에서도 이미 4세기 한성백제 시대 칠기를 제작 사용한 흔적이 있는데 1973년 부론초등학교 주변 발굴 조사에서 4호 고분에서 컵형칠기(컵形漆器)가 출토되었다.


원주 칠의 역사

  • 1944년 옻공출(감영앞)

  • 조선시대 각종 수공업을 전업으로 하는 장인(匠人)을 공장(工匠)이라 하였는데, 왕실이나 귀족 · 관인의 수공업적 수요를 위해 서울에 경공장(京工匠), 지방병영과 주·군·현에 외공장(外工匠)을 두었다.
    강원도의 경우 목장(木匠), 지장(紙匠), 칠장(漆匠) 등 18종에 219명의 장인이 있었다.
    원주목의 경우에는 원주목(原州牧)소속 장인이 10여명, 감영소속 22명, 병마절도사 소속 13명 등 45명의 장인(칠장을 포함)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원주군 산림과 내에 설치된 원주 칠 생산조합에서 원주산 옻칠을 일본으로 공출했는데, 일본에서는 옻 진을 주로 군사(軍事) 병기용(兵器用)으로 사용했다.
    그 당시 일제는 우리나라 옻 생산 실태와 옻 진의 품질을 실험했다. 원주산 옻 진은 평안북도 태천군과 경기도 부천군 다음으로 충북 옥천군과 함께 두 번째로 우수하다고 결론을 조선총독부가 냈다.

    칠의 주요성분은 우루시올(Urushiol, 옻산), 수분, 호막질, 함질소물, 유분(油分)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우루시올의 함량이 많은 옻을 좋은 칠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 옻칠의 품질이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하다.
    일제 강점기 양질의 옻을 생산하던 원주 옻칠생산은 광복 이 후 6.25를 거치면서 옻 생산이 미미해졌다.
    ※ 차면이(叉勉里)마을 : 원주지역에서 자연산이 아닌 옻나무를 제일 먼저 식재로 하여 옻칠을 생산, 소득증대를 꾀한 마을이다.